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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허드슨강변 리버사이드교회. /네이버 블로그 한세광은 1933년 늦가을 즈음에 미국 서부 로스앤젤레스를 다녀간다. 남가주대학으로 전학하고 방랑자처럼 텍사스, 아리조나, 네바다 사막 등을 돌아다닐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그는 도산 안창호의 집에 묵게 된다. <로 시(市)로 갔을 때 마중 나온 친구는 나를 안 부인의 댁으로 인도하였다. 그것은 안 부인이 나를 위하여 손수 저녁을 준비해 놓으신 때문이었다. 이날 저녁 처음으로 안 부인을 대하였으나 몸이 좀 부하시고 침착하신 태도는 오랫동안 객지에서 거칠어진 나의 맘을 나의 어머님이나 대하게 되는 듯 친절히 하시어 주었고 반갑게 하시어 주었다. 금년에는 아마 안 부인께서 56세가 되시나 보다. 그러나 그는 건강하시다. 3남 2녀나 되는 자식들을 혼자서 키우시기에 얼마나 노고하시었을까.> 윗글은 ‘한흑구’가 1937년 2월 ‘백광’ 2호에 발표한 ‘안창호 씨 가정방문기’에 나오는 것이다. ‘로 시(市)’는 로스앤젤레스다. 뜻밖에도 도산 안창호의 장남은 할리우드의 직업 배우였다. 도산 안창호의 장남 필립 안. 할리우드 배우로 이름을 떨침. /사진 소장=정종화 영화연구가 할리우드 영화 ‘장군 새벽에 죽다’에서 일본군으로 출연한 필립 안(맨 왼쪽). /사진 소장=정종화 영화연구가 <장남 필립 군은 언변에 재간이 있고 또한 연예(演藝)에 소양이 깊다. 몸도 장대한 편이요 맘이 준수하고 담백하여 내외국 사람들의 칭찬을 많이 받고 있다. 그동안 남가주대학에서 3학년까지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금춘(今春)에는 휴교하고 할리우드 시에 있는 모(某) 영화회사에 배우로 취직하여서 동양인 역을 맡는데 배우로서의 평이 높아서 한 달에 천이백 불이라는 거액의 월급을 받고 있다고 했다. 참으로 반가운 소식이었다.> 뒷날에 한흑구가 안창호를 만나 장남 소식을 전하였을 때 그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자꾸 말려도 듣지 않고 밤낮 연극 연극 하더니 종내 배우가 되어서 나를 광대의 아버지를 만들었구려! 그러나 자기가 원하는 직업을 얻었다니 매우 기쁩니다.” 한흑구는 안창호의 장남 필립을 만난 김에 하룻밤을 바쳐 희곡 대본을 쓰고 필립과 같이 무대에 올라 배우 행세도 했다. 인생을 통틀어 ‘처음이자 마지막인 배우’가 된 것이었다. 릴게임 양귀비 <로 시(市)에 있는 조선인들이 하룻밤을 유흥회(遊興會)로 모였는데 그날 밤에 ‘신여성의 구혼’이라는 극본을 써가지고 그를 주역으로 하여 무대 위에서 같이 출연하던 생각이다. 이것은 나의 자랑이 아니라 그의 연기가 얼마나 알려졌던지 신문(조선문)에 광고를 하였더니 백여 리나 넘는 촌에서들까지 조선 형제들이 쓸어 모여서 오백여 명의 관중을 가지는 대성황을 이루었었다.> 미국 여배우 바바라 스탠윅. /나무위키. 스탠윅의 사진을 책상 위에 두고 있던 한흑구는 나중에 지휘하는 안익태의 사진으로 바꾼다. 한세광은 그해 12월에 다시 필라델피아로 와서 김블형제백화.에 일자리를 잡고 죽마고우 안익태와 만났다. 1933년 크리스마스를 앞둔 날, 그는 사흘 휴가를 얻어 뉴욕에 가본 적 없는 친구를 데리고 뉴욕으로 출발했다. 안익태가 미국의 ‘전국음악콩쿠르’에 출연하는 것이었다. 교통편은 뉴욕행 급행열차였다. 세 시간쯤 걸려 뉴욕 유니온정거장에 도착해 지하철로 갈아탔다. 숙소는 브로드웨이 116번가, 현대식 고층 아파트 사이의 낡은 4층 돌집, 나라를 빼앗긴 조선 사람들에게는 공사관보다 더 큰 역할을 해주는 한인감리교회는 뉴욕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로 꼽히는 허드슨강변의 리버사이드교회(Riverside Church)와 가까웠다. 석유왕 록펠로가 기부한 고딕식 교회, 여기서 음악콩쿠르가 열리니 안익태에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숙소였다. 첼로 연습에 지장이 없고 숙식 문제도 해결해준 한세광은 친구를 안내해 뉴욕을 유람했다. 토요일 오후와 밤, 일요일 오후를 그렇게 보냈다. 월요일 아침에는 음악콩쿠르 지원 서류를 작성해 접수해줬다. 다음 행선지는 유니온역, 11시 급행열차를 타야 하는 친구에게 안익태는 콩쿠르에 입선하면 유럽에 한번 가볼 생각이라고 했다. 이날 이때를 포항의 ‘늙은 한흑구’는 이렇게 회고한다. <“유럽에 가려면 상당한 돈이 필요할 터인데···. 그러나 예술가건, 과학자건 다 유럽에 한 번은 갔다와야 해. 또 유럽에 있는 사람은 미국에 한 번 다녀가야 세계적인 명성을 날릴 수 있는 거야. 하여간 이번 콩쿠르에 당선하고, 그다음 카네기홀에 데뷔하게 되면 세계적으로 일류가 되는 걸세. 꼭 성공하게.” 나는 안에게 간곡하게 부탁하고 또한 격려하여 주려고 하였다. 모바일 오리지날야마토2게임 이때 필리 행의 급행 승객들은 폼으로 나가라는 마이크 소리가 들려왔다. 안과 나는 일어서서 굳게 악수를 하였다. “그동안 자네 신세를 많이 졌네. 이렇게 또 떨어지게 되니 한없이 서운하네.” 안의 눈 속에는 눈물이 어리어 있었다. “아무리 넓은 세상이라고 해도 또 만나게 안 되겠나.” 기차에 오르자 나는 안을 향해서 손을 흔들었다. 안도 손을 흔들면서 한 손으로 수건을 꺼내 얼굴을 닦았다.> 눈물 묻은 손을 흔드는 젊은 음악가와 젊은 문학인은 서로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것이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마지막 모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생은 하나의 항해다.’ 달리는 기차에서 한세광은 영국의 비평가 존 러스킨의 말을 생각했다. ‘인생은 하나의 흘러가는 그림자다.’ 셰익스피어의 말도 생각했다. ‘누구든 저마다의 항해를 피할 수 없다. 각별하고 애틋한 우정도 흘러가는 그림자일 것이다.’ 이렇게 그는 스스로 다그쳤다. 그래도 너무 허전했다. 안익태가 전미음악콩쿠르에서 2등을 차지했다는 소식을 라디오로 듣고 신문에서 확인한 한세광은 침대 위에 엎드려 눈물을 흘렸다. 늘 다니는 담뱃가게, 음식.에 들러서도 친구의 소식을 자랑하고 책상 위에 놓아둔 여배우 스탠윅 사진에도 자랑했다. 며칠 지나서 안익태의 편지를 받았다. “연습에 너무 지치지 않았던들 1위를 했을 것”이라면서 “뉴욕 제2심포니오케스트라의 제1첼리스트로 취직이 되었으니 모두 한 군이 축복해준 덕택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1934년 새해 벽두에 안익태는 한세광에게 순회공연 소식과 함께 “‘코리아 판타지’를 완성하여 작곡자인 자신이 지휘하는 것이 좋겠다는 제안을 받아 처음으로 바통을 손에 들고 카네기홀에서 지휘자 데뷔에 성공하게 되었다”면서 “지휘자로서 세계적으로 출세할 결심”이라는 편지를 보내왔다. 안익태 작곡, 안익태 지휘의 카네기홀 ‘코리아 판타지’ 초연에 대한 신문의 논평도 좋았다. ‘충분한 동양적인 정서를 지닌 애수적인 작품’이라고 했다. 안익태를 유럽으로 보내줄 든든한 후원자도 있었다. 한세광 덕분에 인연을 맺은 윌리 부부였다. 1933년 12월14일 신한민보. 처음으로 ‘흑구’라는 필명을 활자화하면서 시 200편과 영시 100편을 썼다고 밝힌다. /아시아 제공 그때 진작부터 귀국을 준비하고 있던 한세광은 1933년 12월14일 ‘신한민보’에 최초로 ‘흑구’라는 필명을 올리고 ‘흑구시집편초’라는 제목으로 시 연재를 시작한다 릴게임백경 . 그것이 지면에 최초로 등장한 ‘흑구(黑鷗)’, 검은 갈매기다. ‘흑구시집편초’라는 제목 밑에 ‘한세광’이란 성명이 박혀 있어도 드디어 ‘흑구’라는 필명을 가슴 깊은 곳에서 햇빛 속으로 내놓은 것이다. “재미 5년간 고학생활을 하며 여가에 약 200편의 시와 100편의 영문 시를 썼다”고 밝힌 시인은 “그중 자선(自選)한 시편을 다시 ‘사향 시편’, ‘방랑 시편’, ‘님께 드리는 시편’, ‘인생 시편’, ‘영문 시편’의 5부로 편찬하여 나의 초기 작품으로 발표한다.”고 밝혔다. 첫 회가 나가는 ‘신한민보’에는 ‘시인의 말’도 나왔다. <어머님의 병보를 받고 귀국하기로 준비하는 나는 미국에 유하는 여러 동무들을 생각한다. 나는 많은 동무들의 사랑을 받았으나 아직까지 나는 그들에게 즐거움을 주지 못하였다. 미국을 떠나려는 나는 나의 ‘시편’에서 수삼십 편을 꺼내어 여러 동무에게 주고 가기로 생각한다. 잘 되었건 못 되었건 이것은 모두 재미 간 나의 젊은 날을 노래한 것들이다.> 뉴욕 카네기홀에서 열리는 안익태 첼로 독주회를 알리는 ‘조선일보’ 1934년 2월15일 기사. ‘신한민보’에서 ‘흑구시집편초’ 연재를 마친 즈음, 런던에 가서도 지휘자로 이름을 얻고 돌아온 안익태는 뉴욕 카네기홀에서 세계적 음악가로 대성하는 미래의 문을 활짝 열어젖힌다. 그 소식은 1934년 2월15일 ‘조선일보’를 통해 고국의 동포들에게도 널리 알려진다. 해당 지면은 안익태 뉴욕 연주회 포스트 사진을 오른쪽에 배치하고 제목을 넉 줄이나 뽑았다. ‘미국음단의 총아/우리 음악가 안군/첼로 독주가, 익태·안의 쾌소식/거장 짐바리스트 씨도 추천’ ‘흑구’로 거듭난 한세광은 1934년 3월 중순에 샌프란시스코로 올라간다. 출항은 3월24일, 산페드로 항. 햇수로는 여섯 해나 되는 꼬박 다섯 해 전, 스무 살 때 흘러왔던 태평양 뱃길을 스물다섯 살에 거꾸로 흘러가야 한다. 달라진 것도 있었다. 그때는 일본 여객선 ‘대양환’이었는데, 이번에는 미국 여객선 ‘후버호’다. 항해에 걸리는 시간도 한 달에서 보름으로 절반쯤 줄어든다. 아버지는 아들과 함께 아내 곁으로 돌아갈 형편이 아니었다. 고국의 형무소에서 풀려나긴 했으나 조선에 머무르고 있는 안창호, 그의 빈자리를 미국에서 메워야 하는 한승곤은 흥사단을 중심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보내줄 동포들의 성금 모으기 행사도 꾸려야 했다. /이대환 작가 2심포니오케스트라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