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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법대 24회 졸업 동기들. 얼치기 법대생 서울법대생. 1960~70년대 대한민국 국민 누구나 부러워하는 청년 신분이었다. 장래가 절반쯤은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지방 출신은 더욱 그러했다. 내 고향 밀양은 작은 고을이다. 역대 서울법대생은 몇 안 되었고 판·검사도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고향 사람들은 내가 응당 판·검사가 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듯했다. 함께 입학한 이사성 군도 마찬가지였다. 같은 면 출신인 우리는 비교적 알려진 집안의 후손들이었다. 마주치는 사람마다 언제 '고시'를 치르는지 묻는 것이 기본 수인사였다. 외국에서 돌아오기 바쁘게 언론에 단골로 오르내리며 전국적인 유명 인사가 된 어머니는 내놓고 아들 자랑을 해댔다. '안가' 자식과는 거리를 두라는 친정 형제들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재회하기 무섭게 어머니는 그동안 밀린 모정의 빚이라도 갚으려는 듯 내 일상에 초미의 관심을 쏟았다. 그런가 하면 일정한 거처도 없이 천지를 유랑하던 아버지도 맏이가 입신하여 당신의 한을 풀어 줄 것이라 기대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나는 양쪽 다 부담스러웠다. 처지와 입장이 정반대인 두 육친 사이에 윤리적, 정서적 균형을 잡는 일이 매우 힘들었다. 날이 갈수록 어지러워지는 아버지의 가정사에 환멸을 느꼈다. 복잡한 가정의 장남이라는 굴레가 너무나도 무겁게 느껴졌다. 내가 대학에 입학할 즈음 발병한 동생은 속말로 '냉탕 온탕'을 들락날락하면서도 서서히 성장하고 있었다. 그가 성인에 이르는 과정이 순조로울 리가 없었다. 가족의 헌신적 배려가 필요한 병인 줄 알면서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성가심과 연민으로 얽힌 형제 의식은 둘의 평생 동안 이어졌다. 서울법대는 법학과(100명)와 행정학과(60명) 두 개의 학과로 구성되어 있었다. 커리큘럼은 전체에 개방되어 있었기에 두 과 사이에 실질적 차이가 없었다. 졸업생은 사법시험이나 행정고시 또는 외무고시를 치러 공직에 진출하는 것을 정통의 진로로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나는 1966년 3월 법학과에 입학하여 1970년 2월에 졸업했고 4년 내내 존재감이 매우 약한 학생이었다. 저절로 드러나지도, 애써 나서지도 않았고 학교에 깊은 정을 주지도 않았다. 야마토게임장 특별하게 따른 교수도 없었다. 남들이 뭐라든 나 스스로 법대생이 된 것이 그다지 자랑스럽지 않았다. 보다 근원적인 지식에 대한 욕구를 법대 캠퍼스에서 채울 수가 없었다. 1학년 교양 과목은 그런대로 넘길 수 있었고 2학년부터 시작된 전공 과목도 특별히 좋아할 이유도 없었지만 굳이 싫어할 이유도 없었다. 단지 법학이 성에 차지 않았을 뿐이다. 적성에 맞느니 않느니 따지기 앞서 독하게 또는 성실하게 공부하지 않았다. 1학년 말에 문리대로 전과할 것을 심각하게 고민했다. 고교 시절의 희망대로 사학과로 가고 싶었다. 문리대 교정에서 열리는 각종 토론회를 기웃거리면서 호기심이 더욱 깊어졌고 왠지 모를 선망이 일었다. 나는 전과 문제를 어머니와 상의했다. 어머니의 분노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전철을 밟는다면서 화를 내면서 만약 내가 전과라도 하면 어렵게 다시 맺은 모자 간의 인연을 끊겠다고까지 극언했다. 전과 시도를 접고 법대에 눌러앉아서 덤덤하게 세월을 죽였다. 사법시험을 외면할 생각도, 반드시 합격하겠다는 강한 집념도 없었다. 그래서 졸업과 동시에 군에 입대했다. 일도일념으로 고도의 집중이 요구되는 암기 위주의 시험공부를 나는 마치 에세이 읽듯 긴장감 없이 흘렸다. 고교 시절을 파행적으로 보낸 여파가 내 심신에 배어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즐기지 않더라도 열심히는 해야만 했다. 대부분의 고시생처럼 3학년 말에 치른 1차 시험에 합격했다. 그러나 졸업을 앞두고 치른 2차 시험에 낙방한 소식을 신병훈련소에서 접했다. 졸업 수십 년 후, 모교에서 정년퇴임한 직후에 동기생들이 '나의 인생이력서'란 제목의 문집을 냈다. 거절할 명분이 서지 않아 나는 짧은 글을 실었다. "나는 대학 시절을 열심히 살지 못했다. 어떤 학술 서클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산만한 독서와 약간의 기행으로 흘려보낸 셈이다. 160명 동기생들 중에 어떤 관.에서 보든 이렇다 할 특장이나 대표성이 없는 내가 모교 교수로 재직한 것은 실로 특별한 행운이었다. 나보다 앞서 부임하여 함께 재직했던 최종고, 박세일 두 사람은 학생 시절부터 이미 존재감을 강하게 심어 준 동기생이었다 오리지널오션파라다이스 . 모든 면에서 셋 중에 가장 뒤진 내가 모교 학장직을 맡았던 것도 아이러니다. 지난 8월에 내가 정년퇴임하면서 우리 24회의 모교 교수 시대는 막을 내렸다. 제각기, 그리고 세 사람이 합쳐 모교와 우리 사회에 어떤 기여를 했는지는 후세가 평가할 일이다. 내 경우는 최소한 동기생들에게 큰 누가 되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다." (서울법대 24회 졸업생 문집 '나의 인생 이력서', 2013.10.) 외국서 돌아와 디자이너로 유명 인사가 된 어머니 '조세핀 조'. 부모 그늘에 눌린 대학생 나의 일상에 부모님의 그늘이 덮어씌워진다는 것을 의식하게 된 것은 대학 초년인 1966년 여름의 일이다. 당시 한창 이름을 날리던 어머니가 널리 읽히던 주간 신문에 기고한 적이 있다. 학생 데모로 대학이 조기 방학하자 나라와 학생을 함께 걱정하는 그런 내용이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어머니의 필력을 찬탄하는 말을 전해 왔다. '조세핀 조, 디자이너'라는 필자 이름에 더하여 괄호 속에 (서울법대 1학년, 안경환의 어머니)가 명시되었던 모양이다. 이 글로 인해 나와 어머니의 모자 관계는 만천하에 공시되었고 그 후로 나의 일상에도 많은 제약이 따랐다. 그전까지 나의 존재를 잘 모르던 동기생들도 내가 언론에 일상적으로 오르내리는 유명 인사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시인 안도현은 내 어머니의 일생을 소재로 작품을 펴냈다. 안도현, '판탈롱 나팔바지 이야기', 몰개, 2025) 아버지는 몹시 분개했다. 마치 아들을 빼앗긴 듯한 기분이었던 모양이다. 사랑했던 여인이 자신을 떠나 출세 가도를 달리는 모습을 일상적으로 접해야 하는 것은 영락한 사내에게는 편치 않은 일일 것이다. "너는 내 자식이야. 나를 버려서는 안 돼." 아버지가 취중에 쏟아낸 뒤틀린 분노를 접하면서 한없는 절망감이 들었다. 라디오 공개 방송 사건 대학 2학년 때인 1967년 봄의 일이다. 가까이 지내던 동급생 김상철(1947~2012)군이 함께 라디오 공개 방송에 출연하자고 제안해 왔다. KBS 라디오의 〈젊은이의 광장〉이라는 프로그램이었다. 학생 중에 존재감이 컸던 그에게 서무과장이 권하자 상철은 나를 들러리로 달고 갔다 모바일 바다이야기 낮 해파리 . 사전 예비회의가 열렸다. 법대생 둘, 문리대생 둘(여학생 1인 포함)로 패널을 구성했다. 대학생의 면학, 여가 활동, 그룹 활동, 의식구조, 정치 참여 등 주제별로 나누어 발제하기로 했다. 나는 '대학생의 면학'이라는 주제를 맡았다. 대학생이 너무 가볍게 일상을 보내는 세태를 비판하는 요지였다. 상철은 대학생의 정치 의식과 현실 참여의 주제를 맡겠노라고 자원했다. 모두가 주저하는 민감한 주제였다. 각자 발언할 내용에 대한 사전 검열은 없었다. 공개방송은 1시간 반에 걸쳐 열렸다. 300석은 족히 넘는 문리대 대강당은 만원이었다. 뒤에 서 있는 청중도 있었다. 학교가 주관하는 행사라서 학생처장인 의과대학 교수가 개회 인사를 했다. 이OO 아나운서(아직도 그의 이름을 기억한다!)의 사회로 비교적 무리 없이 진행되었다. 나는 대학생이 모여 앉으면 진지한 토론보다 실없는 잡담을 선호하고, 논문보다 수필을 즐겨 읽는 경박함을 비판하는 취지로 말했다. 이어서 지식인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언급했다. 당시 대학가에서는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가 엄청난 인기몰이를 하고 있었다. 철학과 문학을 결합한 지식인, 1964년 노벨 문학상의 수상을 거부한 사르트르는 당시 미국이 주도하는 월남전에 강한 반대 의견을 폈다. 그가 1966년 일본을 방문하여 몇 차례 연설한 내용이 드문드문 국내에 전해 왔다. 지식인의 사회적 책임과 역할에 관한 내용이었다. 사르트르가 말하는 지식인이란 '실천적 지식의 기술자, 즉 학자, 기사, 의사, 법률가, 교사 등 지식의 전문가'를 지칭한다. 이들 지식인은 한편으로는 보편적 진리를 추구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지배 계급의 이익에 봉사하는 속성을 지닌다. 그러기에 이러한 전형적인 속성을 직시하여 보편적 진리를 추구하되 지배 계급에 대한 봉사를 거부함으로써 비로소 참지식인으로 설 수 있다는 요지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사르트르의 말처럼 현존 체제에 대한 비판은 지식인이 되고자 하는 대학생이 토론과 논문 쓰기를 통해 길러야 할 사회적 자산이라고 말했다. 청중의 반응은 무덤덤했다. 그런데 마지막 즈음에 돌발 사태가 벌어졌다. 김상철이 마이크를 잡았다. 그는 대학생의 활발한 정치 참여를 옹호하는 강한 발언을 했다. 폭탄의 뇌관을 터뜨린 것이다. 안경환 명예교수(서울대 로스쿨)·전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 반대인 두 육친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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